(오늘 아침 서귀포 하늘 )
나귀는 소에 비하여 힘이 약한 동물이다.
무거운 것을 싣거나 멀리 갈 수가 없으며, 성질 또한 경박하고 괴팍하다.
이 때문에 고귀한 집안의 자제들을 태우는 일은 나귀가 오로지 도맡아 한다.
사람들은 경쟁적으로 나귀를 좋아하여 그 값이 늘 큰 소보다 윗자리에 있다.
민간의 비천한 백성들은 비록 돈이 있어도 감히 나귀를 사서 탈 수 없다.
그러니 나귀의 등은 귀하다 하겠다.
농부는 소의 힘이 아니면 농사를 짓지 못하고, 사람들은 곡식을 먹기 못하면 죽게 되니,
소 또한 귀하게 여길 만하다. 그러나 곡식을 수북하게 쌓아놓은 부자들은 즐겨 소를 잡아
제 몸을 살찌우는 일을 하고, 그 아들과 손자는 또 곡식을 돈으로 바꾸어 나귀를 사서 제 몸을 태운다.
그 아들과 손자 중에는 곡식을 가지고서 제 나귀를 사육하기까지 한다.
괴상하지 않은가? 사람들이 소를 천시하고 나귀를 중시하는 것이 그 외모 때문에 그러한가?
나귀는 비단이 아니면 안장에 깔지 않고, 오색실이 아니면 고삐로 쓰지 않는다.
붉은 끈을 흔들면서 부드러운 고삐를 드리운 채 의관을 잘 갖추어 입은 이가 나귀를 타니,
사람들은 “나귀가 참 아름답다”고 한다. 소는 코를 뚫고 튼튼한 나무로 목덜미를 잡아매고
거친 새끼줄로 겹겹이 얽어맨 채, 벌겋게 살갖이 탄 사람이 재촉해대니,
모두들 “소가 참 사납다”고 한다.
아, 나귀가 아름답고 소가 사나운 것은 곧 사람이 그렇게 만든 것이요,
또 그렇게 됨에 따라 아름답게도 여기고 사납게도 여기는 것이다.
어찌 그 리 생각이 짧은가?
소는 그 힘을 써먹고 그 고기를 먹는데,
나귀는 그 장식을 화려하게하고 그 외모를 사랑하니,
심히 옳지 못한 일이라 하겠다.
- 권상신 (1759 ~ 1824), “글로 세상을 호령하다” 중에서 -
♧ 실용보다 외모와 허례허식을 중시하는 세태를 풍자한 글이라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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