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라산 시로미 나무 .. 입술같이 붉게 ,, 물들었네요... )
입 술
- 허수경(1964~ ) -
너의 입술이 나에게로 왔다
너는 세기 말이라고, 했다
나의 입술이 네 볼 언저리를 지나갔다
나는 세기초라고, 했다
그때 우리의 입김이 우리를 흐렸다
너의 입술이 내 눈썹을 지나가자
하얀 당나귀 한 마리가 설원을 걷고 있었다
나의 입술이 너의 귀 언저리를 지나가자
검은 당나귀 한 마리가 석유밭을 걷고 있었다
바람이 불었다
거리의 모든 쓰레기를 몰고 가는 바람
너의 입술이 내 가슴에서 멈추었다
나의 입술이 네 심장에서 멈추었다
너의 입술이 내 여성을 지나갔다
나의 입술이 네 남성을 지나갔다
그때 우리의 성은 얼어붙었다
말하지 않았다
입술만 있었다
입술은 자웅동체이며 지렁이과에 속한다.
혼자서 상대의 몸을 대지 삼아 온 곳을 누비고 다닌다. 입술에는 눈도 코도 귀도 있다.
입술에 별개의 감각들이 있어, 대뇌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는 뜻이다.
입술 앞에서 옛 세상은 끝장나고, 새 세상이 열린다.
입술이 눈썹에 닿으면 그게 백미(白眉)여서 설원이 열리고,
귓바퀴에 닿으면 그게 유전(油田)이어서 검은 물이 쏟아진다.
두근대며 심장을 흉내 내는 입술, 남성과 여성을 대신하는 입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입술―바로 입맞춤할 때의 그 입술이다.
여기에 무슨 췌언이 더 필요하랴. 그저 백지영의 노래나 흥얼거릴 뿐, 벌써 입술을 주고….
<권혁웅·시인>
- 중앙일보 시가 있는 아침에서 -
.................................................................................................................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입술...
가끔은 말없음이,, 말을 하는것보다,,
더 의사전달이 잘 될 수도 있다는 것....
